본문 바로가기

時事

'자유민주주의의 진실'이란 헛소리를 입증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진실'이란 헛소리를 입증한다

<연재> 미국의 선거제도와 통일의 논리(3)

김상일(전 한신대 교수)



선거 기간에만 자유를 누리는 민주주의

지 금 한국의 보수 우익들은 ‘자유민주주의’를 금과옥조 같이 여기고 있지만 막상 이 제도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미국, 프랑스(혁명의 결과로)의 ‘대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미 루소(1712-78)는 다음과 같이 신랄한 비난을 하고 있다.

즉, “영국의 인민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사회 계약론』, 3권 15장)

최근 버나드 마넹은 ‘선거는 민주적인가’(휴머니스트, 2007, 13쪽)에서 “‘대의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정부 형태는 애초에는 민주주의의 한 형태 혹은 인민에 의한 정부로 간주되지 않았던 제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했다.

우 리 국민들은 2007년 12월 19일 압도적인 다수로 선출한 우리의 대통령으로부터 불과 5개월 만에 물대포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5년 후 선거 유세 기간 몇 주 동안 자유를 만끽하면서 또 새로운 대통령을 뽑을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은 “선거 기간 동안에 무슨 말인들 못하겠느냐”고 아예 대놓고 나는 너희들을 속였다고 하면서 안면몰수 철면피가 될 것이다.

이런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 참 모습을 루소는 이미 300여 년 전에 우리에게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북을 향해 일당독제 수령제 운운 하면서 자유 민주주의의 영구불변하는 승리를 장담하고 신념에 차 있다.

그러면 루소가 대의민주주의제의 허구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그가 지적하고 있는 근거의 논리적 배경을 더 심화시켜 간결하게 만들어 놓으려는 것이 이글의 목표이다.

루 소의 말을 다시 요약하면 18세기 영국의 대의 민주주의란 선거 기간에만 인민이 자유를 누리는 일종의 노예제로 본 것이다. 아니 인민이 스스로 제도적으로 선택한 노예제라는 것이다. 선거 유세 2주간의 자유 그리고 5년간의 노예 그것이 바로 대의민주주의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루소는 스스로 법을 만드는 자유로운 인민과 자신을 대신하여 법을 만들어 줄 대표를 선출하는 인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인민들이 투표에 의하여 대표를 선출하고 이 대표들이 법을 만드는 이러한 ‘대의정’의 기틀을 만든 두 사람은 J. 매디슨과 E. 시에예스이다.


민주정과 대의정의 애매한 관계

매 디슨에 의하면 ‘대의정’에 대립되는 말은 ‘민주정’이다. ‘민주정’이란 “소수의 시민들이 모여 직접 정부를 운영하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제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공화정’이란 인민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인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가할 수 없어서 대표를 선출하고 이 대표들의 대표성에 의지하여 운영하는 정치제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한 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할 때에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북도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도 북도 모두 ‘공화정’ 이라는 점에서 같다. 인민들이 직접 정부를 운영하는 민주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정’과 ‘공화정’이라는 말을 순수 논리적인 언어, 아니 알랭 바디우의 수학적 존재론적 용어로 바꾸면, 전자는 ‘상황 situation’으로 그리고 후자는 ‘상황의 상태 state of situation’ 와 같다.

정치학자 매디슨의 용어를 논리학의 용어로 바꾸어 놓으면 이와 같다는 것이며 인민과 인민의 대표 간에는 괴리가 있다는 말은 상황과 상황의 상태 사이에 그것이 있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 기서 상황의 ‘상태 state’라는 말은 현대의 ‘국가’라는 말 혹은 ‘주정부’ 라는 말과 같이 쓰인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국가를 경영하는 관료들은 ‘statesman’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괴리시키는 것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 결과는 어떠한 것인가? 바로 이렇게 나타난 결과가 현대 공화제의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대의제도의 근본적인 화근이고 난제 거리라는 것이다.

매디슨은 인민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정 보다는 공화정이 훨씬 우월하다고 보았다. 그는 고대 민주정과 근대 공화정을 비교하여 “고대 민주 정부에서 통치로부터 인민의 대표가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이 아니라, 근대 공화주의 정부에서 집단으로부터 인민의 참여가 완전히 배제 된다”는 데 있다고 하였다.

대의 정부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그 많은 인구를 한 곳에 모을 수 없고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 “선택된 시민 집단이라는 매개를 거치면서 대중의 견해가 정제되고 확대되는 효과를 가진다. 선출된 집단의 현명함은 나라의 진정한 이익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애국심과 정의에 대한 사랑은 일시적인 자기 이익 추구 때문에 나라의 진정한 이익을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보았다.

그래서 결론하기를 “이러한 규제 하에서 민중의 대표들에 의해 선언된 민중의 목소리가 동일한 목적을 위해 소집된 민중 스스로의 선언보다 공공선에 더욱 부합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마넹, 2007, 15)

시 에예스도 매디슨과 같이 대의정은 상업화된 사회에서 자기 생업에 쫓기어 직접 참여라는 민주정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치에 전념하고 자기의 시간을 정치에 바칠 수 있는 대표를 뽑아 정치를 하게 하는 대의정 제도가 적합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마치 노동 분업의 한 형태와 같다고 했다. 대의원과 시민은 서로의 편의를 위해 분업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매디슨 과 시에예스의 대의정에 대한 정의와 찬양은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진보나 보수 모두 이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양 김씨로 대변되는 사람들에 의하여 지금의 의회 민주주의 특히 1987년 6.10 항쟁을 통하여 정착시켜 놓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서양에서 거의 200년 동안 지속적으로 변화를 해 왔으나 대표가 선출되고 공공 결정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관리하는 제도들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넹은 이러한 대의정의 변하지 않는 것을 두고 ‘대의 정부의 원칙’이라고 한다.(마넹, 2007, 16쪽) 이런 대의정의 원칙을 놓고 1990년 대 김대중과 싱가포르의 이광요의 논쟁은 유명하다.

이 광요가 아시아적 가치에 이상 없다고 보고 서구식 대의 민주주의가 동양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 반면에 김대중은 서양식 대의제 민주제도가 동양에도 그대로 유효하다고 보았다. 아마도 서양의 이런 대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는 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논리적으로 정리하면 민주정이 상황에서 시민이나 민중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라면 공화제 혹은 대의정은 민중이 선출한 대표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황의 상태가 상황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하는 방법 즉 선거에 의한 대의원의 선출에는 하나의 원칙이 있어 왔고 그 원칙은 200여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수수께끼

이 렇게 생각하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할 때에 민주와 공화라는 말은 서로 불일치의 개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상황과 상황의 상태 사이에는 일치와 불일치가 동시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성이 사실 두 제도의 모순과 역설을 동시에 껴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민주정에서 그 연장이 대의정인 것 같지만, 그래서 서구의 민주주의는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시작된 것처럼 말하지만, 상황과 상태의 괴리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안다면 차라리 양자는 상반된 제도라고 까지 말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마넹은 “오늘날 재의 정부를 민주정에서 파생된 것으로 간주하지만, 18세기 후반에는 대의제의 계보를 따라 조직된 정부는 민주정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넹은 ‘수수께끼’같다고 했다.

여 기서 마넹이 말하는 수수께끼는 상황과 상황의 상태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 미묘한 차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민주정과 대의정의 선후 관계를 말할 때에 우리는 상식적으로 전자가 후자를 앞선다고 할 것이지만 사정은 그 반대로 후자가 전자보다 앞선다고도 말한다. 이 만큼 양자 간의 관계는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대의정이 간접 통치이고 민주정이 직접 통치라고 말을 바꾸어 놓으면 직접과 간접의 차이를 확연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만큼이나 둘 관계가 복잡하고 단순하지 않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민주정에서 인민이 직접 모인 민회가 모든 결정을 다 좌지우지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서 민회가 직접 참여를 하였다고 하지만 모든 결정을 민회가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당수의 주요 기능을 민화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특정한 기능은 선출된 행정관이 수행했다.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민회가 수행하지 않는 대부분의 업무가 추첨을 통해 선발된 시민들에게 위임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추첨’이다. 그리스의 민주정은 추첨에 의해 뽑힌 대의원에 의해 다스려 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기능은 민회가 아닌 다른 기관에서 수행을 했는데 그렇다면 그 다른 기관과 민회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그 관계가 직접이었는지 간접이었는지 묻게 된다. 그리고 왜 지금과 같이 선거를 하지 않고 추첨을 했는가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왜 선거보다 추첨을 했으며 그들은 왜 민회와 추첨에 의한 민주정과 추첨에 의한 대의정을 함께 사용했는가? 그 이유는 논리적인 문제이다. 상황과 상황의 상태의 연속과 조화를 시도한 어떤 면에서 지금의 제도 보다 더 우월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선거에 의한 대의정이 그 효과를 상실해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연관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말이다.

200년 동안 사용해온 지금의 대의정의 경우에도 직접과 간접의 관계는 애매하다. 요즘 은행에서 펀드를 산 사람들이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은행창구에서 은행 직원의 권유에 의하여 펀드를 샀을 경우 고객은 펀드를 직접 산 것인가 간접으로 산 것인가? 은행 창구의 직원은 은행을 대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개인인가? 고객은 자기가 선택한 것인가? 은행원이란 대표적 개인에게 위임한 것인가?

바로 이런 문제의 애매성이 앞으로 법정에서 가려지겠지만 우리가 국회의원을 선출한 후에도 우리는 국회의원에게 완전히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선출한 대의원이 자기의 의사와는 반하는 언행을 할 때에 직접적인 시위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하려고도 한다. 이것 역시 정치의 후진성 운운 하지만 대의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마는 것이야 말로 후진성일 수가 있다.

이렇게 민주정과 대의정을 직접과 간접으로 정의 했지만 정의해 놓은 다음 다시 직접과 간접을 적용을 해보면 복잡한 구조가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민주정의 간접은 대의정의 간접과 어떤 관계인가? 이런 간접이란 말의 동음다의적 equivocal 현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직접이란 말도 마찬가지로 동음다의 현상을 야기한다.

이러한 민주정과 대의성의 애매한 관계는 결국 요소와 전체 그리고 부분과 전체의 애매한 논리적 관계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요소안에도 있고 부분 안에도 있으며 그것이 전체 안에도 있을 경우 추이적 transitive이라고 한다. 이를 ‘자연스럽다 natural' 고도 한다.

이렇게 추이적일 때에 지금의 의회 민주주의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과거 200여 년 동안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고 자랑한다면 이는 추이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추이적이란 상황과 상황의 상태가 일관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보라 이런 ‘추이적’ 이란 말이 얼마나 모순투성인가를. 다시 말해서 지금의 선거 제도는 승자독식이라는 다수결의 원칙이 아니면 가능조차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상황 속에 요소가 51/49로 표가 갈라져도 승자가 100을 다 가져간다. 그래서 패자의 침묵만이 지금의 대의정을 유지하게 하는 명맥이라고 할 수 있다.

오바마 같은 지도자는 다행히 반대당의 인물들도 기용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한국의 지금 여당 같이 다음 차기의 정권 재창출에만 전심전력 몰두하고 반대하는 표심을 물대포와 언론 장악으로 탄압 그리고 봉쇄해 버리려고 할 때에 대의 민주주의는 조종을 울리게 된다.

상황의 상태가 상황과의 연결이 두절되고 상태에는 있어도 상황에는 없는 경우가 발생하는 데 이를 돌출 excrescence 이라고 한다. 권력이 초과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대의원이 민의를 전혀 대변하지 못하고 당 party, 자기당의 대변인 노릇밖에는 못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 사람들이 대의원을 선거가 아닌 추첨으로 선출한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엄청난 선거 비용의 절약은 물론이지만 상황에서 상황의 상태의 괴리를 그 방법이 더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만 약에 지금 국회의원들이 추첨에 의해 뽑힌다면 아마도 다음에서 재 선출에 대한 야망과 그리고 자기 당의 정권 재창출 같은 것에 이렇게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은 과거 200여 년 간 다시는 이런 추첨제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입헌 군주제하에서도 추첨제는 없었다.

우리는 지금 지난 번 선거후 무엇을 후회하고 있는가? 그래도 앞으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운운하는 것을 그냥 두고 만 볼 것인가?